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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주거문화사

한민족의 형성 기원

by wlqwndls@53@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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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지구상에 처음으로 출연한 시점은 약 300만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의 남동부에서 발견된 화석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습니다. 이들은 간단한 나무 도구 등을 사용하였고 직립보행 하였습니다. 도구를 만들어 생활했으며 구석기시대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가 이들에 속합니다.

 

베이징인과 자바인도 이에 속하였으며, 이들은 살아가면서 점차 지혜가 발달하여 불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었습니다. 이때는 주로 사냥과 채집 활동을 통해서 식량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구석기시대의 중반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출연하면서 이에 속하는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네안데르탈인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고 시신을 매장하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이후 진정한 의미의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구석기시대 후기 약 4만 년 전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선사시대에는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아 기록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현존하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고고학, 인류학, 고생물학 등 인접 학문의 도움을 빌려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형성 시기도 선사시대인 구석기시대 후기로부터 약 70만 년 전부터입니다. 이들은 지리상으로 자연 환경상 만주 지방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방 문화권에 속해 인종학상 신체적인 특질, 몽고점, 담황색의 피부 등이 확인 중에 해당하며, 언어학상으로는 몽골, 만주, 퉁구스어파 등을 포함하는 우랄 알타이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우리 한반도에 살았던 구석기인들도 세계 인류 문명과 같이 비슷한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평남 상원 검은모루동굴, 경기 연천 전곡읍 전곡리, 충북 단양 수양개 등이 있습니다.

 

이런 유적지에서 출토된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석기, 사람과 동물의 뼈 화석, 각종 도구가 당시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말해줍니다. 이들은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여 사냥과 채집 활동하면서 주로 동굴 속에서 거주하고 강가에서 어로 생활하면서 막집 등에 살았습니다. 특히,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집터에서 기둥 자리 등은 구석기 후기부터 나타나는 현상으로 불을 이용한 흔적이 남아 있고 주거지의 규모는 최소 3~4명 또는 10여 명이 거주할 정도의 크기로 보입니다. 이때 구석기 초기 유럽의 경우에도 에스파냐의 북부, 프랑스 남부 일대에서 현생인류인 크로마뇽인이 남긴 동굴벽화 등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 구석기시대와 같은 생활상을 보여줍니다.

 

신석기 시대에는 시베리아와 연결되는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중국의 동북 지방에서 이주하여 농경 생활을 하였습니다. 청동기시대에는 예맥 사람이 민무늬토기 문화를 도입해 한반도에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이 지역에 살았던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은 예맥 퉁구스족과 혼혈되었거나 북쪽 또는 남해의 도서 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로써 고아시아족으로부터 퉁구스족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남쪽 한강 이남에서 유목 생활을 했었으나 점차 정착하여 농경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북쪽의 유목 퉁구스족과는 점차 문화적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한민족이라 할 수 있는 통일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통일체도 대체로 한강을 경계로 지역적 차이가 있습니다. 서력기원 전후에 남부의 농경 예맥족은 '한족'이라는 이름으로 북부와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족은 다시 진한, 변한, 마한의 부족 국가로 분리되어 후에는 신라, 백제, 가야 등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 한족은 지역에 따라 남방으로부터의 이주민과 부분적으로 혼혈이 이루어졌다고 보입니다. 즉, 남서 도서 지방에 오키나와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장례 제도가 남아 있는 것, 제주도의 삼성혈 설화, 수로왕비가 아유타국인이라는 설 등은 남방인 족과 그들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에 상륙하였음을 입증합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강을 경계로 하는 문화의 남북 차이와 낙동강과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는 동서의 차이는 점차 한민족으로서의 공통된 특성이 되었습니다. 현재와 같이 압록강, 두만강 이남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민족이 된 것은 고려 이후의 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동아시아 대륙 동쪽에 위치하면서 인접 지역의 여러 종족과 일찍부터 서로 교류하고 농경문화를 이룩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어 오랫동안 분열된 민족이 정치 · 사회 · 문화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하고, 언어학적으로 신라어를 중심으로 우리 한민족의 어휘인 한국어의 기틀을 마련하여 민족문화의 실질적 형성의 모태가 되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삼국통일 후 나 · 당 전쟁을 통해 동족 의식을 가졌던 우리 민족은 보다 강한 하나의 민족성으로 응집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외래의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문화의 폭을 더 넓혀 나갔습니다. 통일신라 후기에 다시 우리 민족은 후삼국시대로 분열되었으나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민족 융합 정책으로 지방 세력을 흡수해 자주성을 회복하였고, 우리 고유 한국어는 개경을 중심으로 확고한 터전 위에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반도 지형
한반도 지형

조선시대에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여 우리의 영토가 가시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또한 유교 사상과 한글 창제에 따른 교육 등을 통해 정신 · 기술적 문화를 크게 진작시켜 민족문화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은 한사군의 침입으로부터 시작하여 크고 작은 침략과 약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들의 지배 속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지 않고 자국어를 잊지 않았으며 굳건하게 지키며 살아온 민족은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유의 한국어는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현재까지 독창적으로 계승, 창달하면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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